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소보 전투 (문단 편집) ==== 1444, [[바르나 전투]] ==== 하지만 이교도와의 약속은 지킬 필요가 없다는 교황의 주장에 따라 [[후녀디 야노시]](38세)는 불가리아 왕관을 수여받은 1444년 11월, 흑해 연안의 바르나로 진격하였다. 이 [[바르나 전투]]에서 십자군은 대패했으며 헝가리-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가 전사하였다. [[세르비아 공국|세르비아 전제군주국]]의 주라지는 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으며 오스만 측과의 평화 약속을 지켰기에 한동안 안전하였다. 이후 1446년 요청으로 복귀한 [[무라트 2세]]는 알바니아와 그리스 남부 전선에 관심을 기울였고 [[후녀디 야노시]]는 [[헝가리 왕국|헝가리]] 국왕으로 선출된 후 [[왈라키아 공국|루마니아 일대]]를 장악하느라 시간을 보냈다. 1447년 왈라키아 공국에서는 [[블라드 가시공]](17세)이 [[보이보드]]로 올랐으나, 직후 [[후녀디 야노시]](41세)에게 패해 도망가는 일이 발생한다. 그리고 1448년 가을, [[후녀디 야노시]](42세)는 2만 5천에 이르는 헝가리-[[왈라키아 공국|왈라키아]] 군대와 다뉴브 강을 건넜다. 오스만과의 아슬아슬함 평화를 유지하던 주라지는 전쟁에 반대하였고, 이에 [[후녀디 야노시]]는 그를 적으로 간주하여 [[세르비아 공국|세르비아 전제군주국]] 북부를 약탈하며 진군하였다. 그러자 주라지는 오스만 술탄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